* 왕국 근처에 있었던 나봇의 포도원을 탐낸 아합은 나봇에게 그 땅을 팔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봇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조상의 유산을 팔수가 없다고 이를 거절하였다. 이에 이세벨은 음모를 꾸며서 같은 성에 사는 장로들과 귀족들을 동원하고 불량자 두 사람을 거짓 증인으로 세워서 나봇을 죽이고 말았다. 아합은 나봇이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곧 일어나 이스라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러 그리로 내려갔다는 것이 오늘 말씀의 내용이다. * 열왕기상 16:30에서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라는 말씀처럼 북이스라엘 왕국에서 가장 악하고 나쁜 왕으로 기억되며 그의 아내 이세벨 역시 그에 못지않은 악한 여인이었다.
* 오늘의 말씀을 보면 나봇의 죽음은 참으로 억울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한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이다. 그런데 죽음의 진정한 가치는 ‘그가 어떻게 죽느냐?’보다 ‘그가 하나님 앞에 살았느냐?’에 달려 있다. 기독교 역사에서 복음을 전하다 죽임당한 순교자들은 악한 자에 속한 자들에 의해 무자비하게 처형되었다. 죽음의 방식은 억울하고 끔찍했으나 그들은 죽음으로써 지금도 믿음을 증거 하는 것이다. 그들이 증언하는 믿음은 한결같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다. 나봇의 죽음 역시 문자적으로 보면 억울하기 그지없는 죽음이지만 구속사적으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어떠한가? 인간의 음모 속에 가장 힘없이 죽은 사람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나봇과 같이 모함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셨다. 그는 죄가 없으셨으나 그냥 무기력하게 끌려가고, 조롱과 비웃음, 멸시와 천대를 받고, 채찍에 맞고, 마침내 아주 힘없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팔리게 하셨고, 마침내 의 십자가 죽음으로 이끄심으로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대속의 죽음이었다. * 우리 모두 역시 정해진 유한한 인생을 산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가 없으며 반드시 죽게 되어 있다. 그러나 죽음도 빼앗을 수 없는 기업, 곧 영원한 기업인 영생이 우리에게 있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죽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사느냐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자는 더 이상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죽었다가 다시 사신 주를 위하여 살아가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