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령이 가난한 자 복이 있나니> 가난한 자는 헬라어로 프토코이라고 하는데 자기능력으로는 자활이 불가능한 절대 빈곤의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프토코이라는 말은 부자집 앞에서 주워 먹던 거지 나사로와 자신의 전 재산인 두 렙돈을 헌금함에 바쳐 완전히 빈손이 된 과부 등을 나타낼 때 사용된 말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시는 가난은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뿐만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자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가난은 물질적인 가난보다는 내면적인 가난, 영적인 가난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들이 받는 복이 물질적인 보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받는 복은 천국으로서 물질세계의 복이 아니라 영적세계의 복이기 때문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자신의 마음 속에 담겨져 있는 교만과 욕심, 미움과 증오, 불신과 의심 등의 죄악을 깨끗이 회개한 자를 가리킵니다. <애통하는 자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심령이 가난한 자와 긴밀하게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애통함은 심령이 가난할 때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으로서 영적인 슬픔을 의미합니다. 이 애통함은 죄 때문에 오는 우리의 영적 상태의 절실한 궁핍과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은 불의에 대한 애통이며 하나님에 대한 반역과 반항 때문에 슬퍼하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 복이 있나니> 온유하다는 뜻의 프라우스는 온화한 사람, 유순한 짐승 또는 친절하고 관대하다는 뜻입니다. 온유하다는 것은 먼저,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신뢰와 순종을 말하며, 또 사람들에게 함부로 화내지 않으며 부드러운 것을 말합니다. 결국 온유하다는 것은 겸손함을 의미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거칠게 반응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겸손히 하나님께 내어맡김으로 영적 평정심을 유지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복이 있나니> 의는 두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윤리적인 의미에서 의가 있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구원행위로서의 의가 있습니다. 산상수훈에서는 윤리적인 의를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원행위로서의 의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윤리적으로 온전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선언해 주기를 고대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심령이 가난한 자인가> 사순절을 지나면서 우리 심령이 가난하도록 늘 힘써야 합니다. 함부로 먹고 마시면서 귀중한 시간과 기회를 낭비해서는 안됩니다. 신앙에 있어서 영적인 진보가 있어야 합니다. 저절로는 심령이 가난해질 수가 없습니다. 먼저 우리 심령을 비워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심령을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야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는 소망입니다. 예수님은 행복의 기준을 완전히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