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에 대한 질문 1.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증명해 봐라, 그러면 내가 믿겠다." 그럼 전 이렇게 대답하지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증명하는 대신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면 내가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 하나님이 계시다, 계시지 않다 하는 것은 증명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증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 각자가 가지고 있는 전제의 문제입니다. 신념의 문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세계관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고 준거틀이라고도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계시다 안 계시다,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각자가 선택한 신념인 것입니다. 거기에서 이제 하나님이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유익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보는 것이 의미 있는가 하는 것은 각자 선택해야 할 문제겠지요. 하나님 계시다는 것, 증명할 수 없습니다. 또 계시지 않다는 것 역시 증명할 수 없습니다. 2. 선하신 하나님이 왜 이 땅의 많은 고통을 해결하지 않습니까? 사실 세상에는 고통이 너무 많습니다. 불교식으로 얘기한다면, 고통의 바다 속에서 어떻게 인생을 살 것인가 허우적대는 모습이 바로 우리 인간의 실상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극단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왜 하나님은 이런 문제를 즉시 해결해 주시지 의아해 합니다. 사실 고통과 고난은 인간에게 매우 절실한 문제인데, 하나님은 이 문제를 즉시 해결해주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고통을 겪게 된 근원적인 문제에 답변을 주시고,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셨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이 인간이 겪고 있는 고통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는 이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는 것을 통해 이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신다고 하지요.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과 다시 오실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질문하고 답변을 얻어 가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선하신 하나님이 왜 천국과 지옥을 만들었습니까? 천국과 지옥에 대한 질문들을 많이 합니다. 사실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는 아무리 설명을 해도 잘 알기가 어렵고 이해하기도 매우 어렵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천국과 지옥을 일종의 공간 개념으로 생각하며 그 한도 내에서 추측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해 우리가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이 정도입니다. 천국은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하겠다고 결정한 사람들이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있는 곳이고, 지옥은 하나님을 거절한 사람들이 하나님 없이 영원을 사는 곳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형식으로 만들어져 있는지, 또 영원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등은 우리가 알 도리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매우 중요한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은 하나님과 함께 있는가, 아니면 함께 있지 않는가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각자 선택한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이리로 보내고 저리로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실 천국과 지옥은 우리 모두가 누구든지 자기가 선택하는 것에 따라 갈 수 있는 곳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4.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만들어서 죄를 짓게 하셨습니까? 성경을 읽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선악과에 대해 질문합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을 줄 아셨으면서 왜 하나님은 선악과를 만들어서 인간을 이렇게 곤경에 빠트렸냐고 묻습니다. 선악과는 철학적으로도 깊이 생각해 봐야 할 요소가 많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점은 선악과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라는 것을 천명해 준다는 사실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인간에게 모든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뭐든 다 할 수 있었습니다. 단 하나,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는 조항이 있었습니다. 이 조항을 지키지 않음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역행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선악과는 에덴동산 한가운데에 있었기 때문에 실수로 따 먹을 일도 없었습니다. 선악과가 에덴동산 한가운데 있었다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의지로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다른 모든 자유가 주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써 하나님보다 더 큰 존재,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되고자 시도했던 것이지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리를 이탈해 신의 자리로 가려고 하는 것, 갈 수도 없고 가서도 안 되는 것을 인간은 선악과를 따 먹는 행위를 통해 했던 것입니다. 동물과 달리 인격을 가진 인간은 인지적으로 이해한 다음 의지적으로 결단해서 그 결단에 대해 책임을 집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선악과를 주셨다는 것은 인간을 인격적인 존재로 창조하고 사랑하셔서, 선악과를 통해 인간이 하나님께 인격적으로 반응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만약 선악과가 없었다면 우리는 그저 잘 발달된 동물, 본능에 의해 움직이는 동물 이상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5. 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고난을 겪습니까?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이 땅에서 고통을 많이 겪지 않고 잘 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성경에서 천명하셨듯이, 하나님은 선인과 악인에게 동일하게 햇볕과 비를 주시는 분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고난을 덜 받게 된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고난을 더 많이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에는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그것은 이 땅을 살면서 고난을 피할 수는 없기에 고난을 겪지만, 그 고난의 의미를 알고, 그 고난을 의연하게 이겨 나갈 수 있고, 고난에 짓눌려 버리지 않을 수 있다는 소망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아픈 데 반창고를 붙여 주는 간편하고 얄팍한 종교가 아닙니다. 오히려 고난을 통해 인생을 깊이 이해하고 하나님을 알아 가며 궁극적인 소망을 갖는 종교입니다. 6. 과학과 신앙은 양립할 수 있습니까? 과학이 발전하면서 신앙과 갈등을 일으킨 경우가 많습니다. 천동설과 지동설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지요. 최근에는 진화론과 관련된 문제도 심각한 문제 중 하나일 것입니다. 물론 겹치는 부분도 있지만, 과학과 신앙은 사실 탐구하는 대상이 매우 다릅니다. 과학은 우리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경험가능한 세계를 대상으로, 인간의 합리적인 사고와 반복되는 실험과 인간이 가진 상상력을 사용해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가설을 세웠다가 그것이 차차 이론으로 정립됩니다. 인간의 지식이 지속적으로 발달함에 따라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물론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도 다루지만, 그것보다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보다 근원적인 문제에 답을 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과학으로 이야기할 수 없는 가치와 인생의 의미같은 것에 대해 답을 주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신앙과 과학은 건강한 긴장관계를 갖고 상호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인슈타인의 “종교 없는 과학은 맹인과 같고, 과학 없는 종교는 절름발이와 같다”라는 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학만으로는 방향을 잡을 수 없고, 종교만으로는 걸어갈 수가 없습니다. 이 두 가지는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겸손하게 서로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7. 왜 기독교인들은 다른 종교를 폄하하고 무시합니까? 사실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종교를 무시하거나 폄하하는 일들이 있어서, 그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사과하고 싶기도 하고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종교는 모든 문화의 중심입니다. 도대체 인간의 의미가 무엇인가, 산다는 게 뭔가, 이 고통 많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하면 이 고통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가 등을 고민하면서 만들어 낸, 깊은 성찰과 사색과 침묵과 기도와 명상 가운데 얻은 진리들을 모아 놓은 것이 종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종교는 인간문명의 꽃과 같은 아주 핵심인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종교에는 일정량의 진리가 반드시 들어 있습니다. 인간이 암중모색하듯 찾아낸 아주 귀한 진리의 편린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종교를 무시하거나 무례하게 행하는 것은 부당한 것입니다. 좀 심하게 말해 스스로의 무식을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 행위입니다. 8. 기독교 외에도 구원이 있습니까? 모든 종교가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다고 얘기하면, 사람들은 곧바로 “그럼 기독교 외에도 구원이 있다는 말입니까?” 혹은 “왜 기독교인은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고 배타적으로 고집스럽게 이야기합니까?”라는 질문을 합니다. 사실 각각의 종교가 서로 존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모든 종교를 살펴보면, 관용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는 종교도 사실은 그 내면을 보면 모든 길이 다 구원에 이른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구원에 이르는 길에 대해 각 종교가 다른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만약 그 다른 주장이 없다면, 그 각각의 종교 자체가 의미가 없어지겠지요. 불교는 불교대로, 힌두교는 힌두교대로, 회교는 회교대로, 기독교는 기독교대로 ‘구원의 길은 이런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고 이야기하기보다는 이런 주장들에 귀를 기울여 보고, 그 중에서 어떤 것이 나의 진실한 질문에 가장 정당한 답변을 주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내가 그 길을 갈 때 그런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질문해 봐야 합니다. 관용이라는 것은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불교가 관용을 가장 많이 이야기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불교의 태생을 살펴보면, 불교는 힌두교의 한계를 보고 힌두교로부터 나와서 만들어진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근본적인 가르침과 힌두교의 가르침은 공존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겠지요. 모든 종교는 각각의 특성이 있고, 동의할 수 없는 근본적인 다른 생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존중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고 쉽게 말해 버리기보다는, 스스로 진실하게 어떤 종교가 자신의 삶의 의미에 답을 주는지 찾아보는 것이 정직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9. 천주교와 개신교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천주교와 기독교의 차이가 무엇이냐는 질문은 잘못된 것입니다. 천주교와 개신교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물어야 합니다. 기독교 안에 그리스정교, 가톨릭, 개신교가 공존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각각 같은 하나님을 믿지만 약간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천주교와 개신교의 관계에 대해 천주교와 개신교가 각각 설명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천주교는 베드로라고 하는 1대 교황으로부터 로마가톨릭에 지속적으로 교황이 승계되어 왔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정통성이 거기에 있다고 얘기하지요. 개신교는 중간에 가톨릭의 한 분파로 만들어졌다고 봅니다. 반대로 개신교는 원시 기독교에서 시작해 초기 300년 동안 순수한 모양을 갖추고 있던 기독교를 로마가 공인해 국교가 된 다음 정치적 색깔을 지니게 된 것이 로마가톨릭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기독교의 본질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종교개혁을 통해 원래 기독교가 가르치던 본질을 되찾은 것이 개신교라고 합니다. 이것이 역사적 시각의 차이입니다. 이제 실제로 믿는 것에서의 차이점에 대해 아주 단순하게 이야기하면, 개신교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하고, 가톨릭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지만 행위도 같이 따라야 하므로 믿음과 행위가 둘 다 필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또 개신교에서는 최종적인 권위가 성경에 있다고 이야기하는 반면, 천주교에서는 최종적인 권위가 교회와 전통에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점들이 천주교와 개신교의 차이입니다. 10. 왜 한국 사람이 이스라엘의 종교를 믿어야 합니까? 적지 않은 사람들이 기독교는 결국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종교인데, 왜 한국 사람들이 이 종교를 믿어야 하느냐고 질문합니다. 물론 우리 한국에도 좋은 사상들이 있고 단군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런데 일단 첫번째는 기독교가 단순히 팔레스타인의 종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대의 여러 사상들에서 아주 중요한 원류가 되는 사상 중 하나이고, 그것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백성을 통해 전수되었고, 예수라고 하는 분을 통해 교회를 통해 인류 보편적인 가치로 발전된 것이 기독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로부터 시작했지만, 그것이 보편적인 종교로 인류에게 다가왔기 때문에 단순히 팔레스타인의 종교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우리 한국에 우리 인간의 의미와 삶의 의미를 알려줄 수 있는 사상과 그런 하나님 또는 신, 진리를 이야기하는 어떤 놀라운 사상이 있다면 심각하게 고려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에는 아주 좋은 여러 사상이 있지만 이런 본질적인 부분에 대해 답변을 해주는 사상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가 어떤 민족주의적인 감정을 가지고 접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현존하는 인류문화에 영향을 끼친 아주 중요한 몇 가지 사상들의 뼈대가 된 것들에서 핵심적인 것 중 하나인 기독교를 그런 각도에서 바라보는 것이 더 균형있는 시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11. 종교가 다른 가족들과 불화하기 싫습니다. 한 가족이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으면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고 하는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실제로 있는 일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한 가족 안에서 서로의 신앙시스템과 신앙을 자꾸 강요하는 데서 온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모든 종교의 가장 중요한 자세는 상호 존중입니다.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고등 종교일수록 그런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중 일부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가족에게 전하고 싶어서 그것을 너무 강요하다 보니 가족간에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 지혜로운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사랑한다면 충분히 듣고 충분히 존중하고 충분히 대화하는 가운데, 인생에 대해 삶의 의미에 대해 신에 대해 진리에 대해 서로 배우고 알아가는 가운데 어느 한쪽으로 개종을 하거나 서로 다른 상태로 더불어 함께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바른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간절한 마음은, 저도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강요를 통해 사람들이 진리로 하나님께로 되돌아오게 할 수는 없습니다. 사랑만이 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12. 기독교인이 되면 제사를 드리지 말아야 하나요? 한국의 아주 아름다운 전통 중 하나가 제사라고 생각합니다. 제사와 기독교의 문제는 굉장히 복잡하고 오랜 역사가 있어서 단순하게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제사가 만약 종교적인 행위로서 종교성을 강하게 갖고 있다면 기독교와 병립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제사가 종교적인 의미보다는 가족의 화합과 문화적인 이벤트로서, 가족이 모여서 서로를 돌아보고 선조를 생각하는 문화적인 행사가 된다면, 그것은 얼마든지 기독교와 함께 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제사를 드리면 절대 안 된다고 확정적으로 말하기보다, 어떤 제사를 어떤형식으로 드리는지 살펴보고, 또 어떻게 함께 갈 수 있을지에 대해 조금 더 고민해 보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조건 제사를 드리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 앞뒤가 꽉 막힌 느낌입니다. 13. 착하게 살면 되지 왜 꼭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죄인이라고 얘기하고 또 다른 사람들도 죄인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굉장히 반발심을 갖습니다. 이 정도면 착하고 진실하게, 성실하게 사는 것인데 왜 자꾸 죄인이라고 해서 죄책감을 불러 일으키느냐고 이야기합니다. 사실 그래서 이순신 장군 같은 훌륭한 분도 죄인인가, 이순신 장군은 구원받지 못 하는가 등의 질문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것은 성경에서 얘기하는 죄의 개념과 일상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죄의 개념이 다른 데서 오는 문제입니다. 성경에서 사용하는 단어가 세상에서 사용하는 단어와 똑같은 의미를 갖지 않을 때가 많은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죄’라는 단어입니다. 세상에서는 도덕적으로 사회적으로 지켜야 하는 것을 지키지 않을 때, 그것을 죄라고 합니다. 그런데 종교는 도덕적·사회적인 행위로 나타나는 것만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을 다루며 죄를 얘기합니다. 화가 나거나 미워한다거나 죽이고 싶다거나 하는 마음 등 행동으로 나오지 않은 나쁜 마음도 죄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종교를 마음공부 한다고도 이야기합니다. 기독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갑니다. 이렇게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보다 더 본질적인 것이 있는데, 그것이 죄라고 합니다. 그 죄는 바로 하나님이 세상의 주인인데 내가 주인이 된 상태입니다. 내가 모든 것의 주인이 된 상태를 죄된 상태, 죄의 근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주의 주인이 있고 내 인생의 주인이 있는데 그 주인이 나라고 주장하는 어떤 사람이 있다면, 그 주인이 볼 때 얼마나 심각한 문제겠습니까?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죄인 또는 죄는 도덕적·사회적인 것, 마음 속에 일어나는 것을 넘어 더 깊은 뿌리에 있는 것입니다. 우주와 인생의 근본과 주인이 바로 나 자신이라고 주장하며 내 멋대로 살겠다고, 내 소견에 옳은 대로 살겠다고 하는 것이 ‘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다면 죄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14. 왜 기독교인 가운데 위선자가 많습니까?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어 교회에 나가 사람들과 어울리다가 많은 사람들이 종종 실망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이중성, 교회가 가진 세속성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말을 듣고 뭔가 있는 것 같아 교회에 나갔는데, 그렇지 않았던 것이지요. 여기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하나님이 이 땅에서 일하고 계신 것을 보여주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고, 여기에 대해 구구절절 변명하는 것은 적당한 처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제가 한국 교회를 대표할 수 있는 입장은 전혀 아니지만, 죄송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두 가지 이야기할 것이 있습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위선자입니다. 앞뒤가 조금씩 다른 게 사람입니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적어도 기독교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앞뒤가 다른 사람들이 점점 투명해져서 앞뒤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를 다니면서 바로 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사람이 변화되어 가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 과정에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위선적이고 앞뒤가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므로 좀 더 기다리고 지켜봐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게 이해할 필요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또 한국 교회도 부족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한국 교회는 역사가 120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아주 어린 교회입니다. 기독교가 세워진 지 약 2,000년이 되었는데, 그 2,000년 동안 기독교가 가지게 된 굉장히 많은 유산들이 한국 교회에서는 소화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여러 이슈에 대해, 사회적인 현안에 대해, 다른 사람들과 다른 종교를 대하는 것에 대해 성경과 지난 2,000년 동안의 유산들을 소화해 낼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하면서 오히려 세상의 영향을 받아 세상처럼 자꾸 변해가는 교회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조금 더 기다려야 될 부분도 있고, 아주 냉혹하고 냉정하게 비판해야 할 부분도 동시에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15. 신앙이란 결국 약자들의 위안이나 의지의 대상이 아닙니까? 사람들은 기독교가 약자들의 종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인간이 어려울 때 의지할 곳이 없으니 결국 신에게 의지하는 비겁한 행동을 하는 것이라고 까지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실 그런 면이 없지 않습니다. 인간이 자기 운명을 스스로 해결할 수 없어 신에게 의지해 문제를 풀어보려고 하는 것이 비겁함으로 보일 수 있는 부분이 분명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고통과 아픔을 겪을 때에야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평범한 존재이고 한계가 있는 존재인지 알게 됩니다. 고통과 아픔이 있을 때 그 전에 자기를 겹겹이 에워싸고 있던 온갖 것들이 벗겨집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매우 순수한 상태가 되지요. 고통과 아픔 없이는 사람이 그렇게 순수해지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자기를 직면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약자가 되고 난 다음에 고통과 아픔을 겪고 난 다음에 하나님을 진실하게 찾는 기회가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리적인 지팡이로써 또는 단순히 마음의 위로를 얻기 위해 하나님을 도구적으로 찾을 때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 인간이 자기 모습을 정말 발견할 수 있다면 그래서 진실하게 자기 한계를 발견하고 그 이상의 존재를 찾는다면 그것은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고통과 아픔은 인생에서 피할 수 없기도 하지만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16. 하나님만 믿으면 되지 왜 꼭 교회에 다녀야 합니까? 하나님을 믿으면 됐지 그렇게 복잡하고 시끄러운 교회에 꼭 가야 하느냐고 질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요즘 농담 삼아 ‘가나안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고도 합니다. ‘가나안’을 거꾸로 하면 ‘안나가’잖아요. 교회에 ‘안 나가’는 신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정말 믿게 되면,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에 대해 알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이 하신 놀라운 일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을 일으키셨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신약에 이르기까지 관통하는 아주 중요한 지식이 바로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이 땅에서 만들어 나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난 다음 교회로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믿게 되면, 그리고 그 하나님이 이 시대에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지에 대해 성경을 통해 정말 알아가게 되면, 교회에 속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비록 그 교회가 흠이 있고 부족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면이 있다 하더라도, 그 교회(에 속한 사람들)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교회 공동체에 속하지 않으면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모습도 자주 보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본질에 해당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7. 교회는 왜 그렇게 교파가 많습니까? 아주 당혹스런 질문 중 하나가, 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왜 그렇게 많은 교단이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사실 한국에 교단이 많은 것에 대해서는 저도 참 못 마땅한 구석이 많습니다. 이렇게 많은 교단이 형성된 것은 사실 개신교의 특성 때문입니다. 개신교는 로마가톨릭과 같이 중앙에서 정치적으로 전체를 통합하는 시스템이 아닙니다. 세 가지 중요한 원리에 따라, 자신의 양심과 신앙의 양심에 따라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개신교인들입니다. 여기에서 세 가지 원리란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입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대로, 믿음과 은혜에 근거해 자신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개신교인들입니다. 성경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그것을 본질적인 차이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비본질적인 면에서 약간씩 차이가 있는데, 그 차이점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 교단이 나뉘어지게 되었습니다. 다른 전통의 교단들이 생겨나게 되었지요. 이것은 인간의 한계이기도 하고, 또 이렇게 나뉜 것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성경을 보는 한계를 극복하기도 하고 상대방을 통해 배우기도 하는 그런 순기능적인 역할도 실제로 했습니다. 이렇게 조금씩 다른 각도에서 성경에 접근함으로써 개신교는 신학적으로 굉장히 많이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명이 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교단들 가운데 어떤 교단이 나뉜 것을 보면, 특별히 한국 내에서 교단이 갈라진 것을 보면, 그 속에서 인간들이 정치적 싸움을 하다가 갈라진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기독교의 본질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 가운데 하나가 자기를 부인하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바에 대해서는 타협 할 수 없다, 한계가 있는 나의 지식에 근거한 믿음이지만 타협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좋은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사역과 개인적인 어떤 이유들 때문에 교단을 갈라지게 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가르치는 것을 거꾸로 행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18. 먼저 술담배를 끊고 교회에 나가겠습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가려면 술과 담배를 끊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요즘에는 또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내색을 하지 않을지 몰라도, 교회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나와서는 대부분 술도 마시고 담배도 많이 피웁니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죄책감을 느끼기도 하겠지요. 술과 담배는 사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인 부분이 아닙니다. 술에 대해서는 좀더 논의할 부분이 많습니다. 성경에서 술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국에 전래된 기독교가 아주 청교도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어서 금주를 강조한것이지 사실은 성경 자체가 금주를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히려 술을 권력이라든지 돈, 섹스와 마찬가지로 잘 관리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버려야 될 것, 단순히 금해야 할 금욕적 대상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절주가 더 어울리는 표현일 것입니다. 담배의 경우도 아주 다른 각도에서 봐야 합니다. 성경에는 아예 담배가 언급조차 되어 있지 않으니까요. 그렇다면 아마도 담배는 자기 자신을 어떻게 돌볼 것인가와, 담배를 피우는 것을 통해 이웃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를 생각하며 다뤄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술과 담배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인 부분이라기보다는 신앙을 어떻게 적용해 나갈 것인가에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술과 담배를 안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표지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건강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20. 교회에는 왜 그렇게 헌금이 많습니까? 헌금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이해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보다 중요한 것이 없는데, 교회가 너무 많은 돈을 요구한다고 느껴질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돈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고 합니다. 성경의 기본적인 생각은 돈의 일정 부분을 하나님과 그의 공동체에 헌금함으로써, 내가 가진 돈의 소유권자가 내가 아니라 그것을 주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일정량을 헌금합니다. 그것을 어떤 규정이 아니라 원칙적인 면에서 10분의 1 정도가 타당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구약쪽 전통을 고려하고 그것을 의미있게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10분의 1은 적은 게 아니지요. 1년이면 한 달 월급에 해당하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그것을 통해 첫째,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물질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고백하고, 둘째, 우리가 속한 교회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에 동참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일부 교회가 자본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교회도 결국 헌금으로 운영된다는 이유를 들어 지나치게 헌금을 강요하고, 또 성경에 있지도 않은 여러 가지 내용을 끄집어내 헌금을 강요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교회는 성도들에게 헌금을 하라고만 가르치며 다양한 헌금을 만들어 낼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물질의 주인이 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어떻게 정당하게 돈을 벌어야 하는가도 가르쳐야 합니다. 헌금의 기본적인 정신을 잘 지켜 나가는 것이 오늘날 현대 교회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21. 성경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습니까? 사실 기독교를 책의 종교라고 하기도 합니다. 성경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지요. 만약 성경 자체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해 놓은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면, 성경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을 것 입니다. 그런데 성경 자체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인간이 듣고 그것을 기록한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성경은 수천년 동안, 거의 15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50명이 넘는 사람에 의해 쓰여진 인류역사가 가진 아주 독특한 문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성경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는가? 참 말하기 어렵습니다. 일주일이나 이주일, 한 달 동안 쓰여진 책도 오류가 있는데, 같이 살아보지도 않은 50명이 넘는 사람들이 3개 언어로 1500년 동안 쓴 책을 도대체 어떻게 신뢰할 수 있단 말입니까? 사실 이 책이 형성되었다는 것 자체가 불가사의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과 같은 인쇄 기술이 있었던 시대도 아닌데, 이것이 1500년 동안 쓰여지고 필사되어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전해졌다는 사실 자체가 아주 기이한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학자들이 문헌학적으로 비교해 이 문헌들이 얼마나 역사성을 가졌는가, 얼마나 진실되게 필사되었는가에 대해 연구해 놓은 것이 많습니다. 성경의 내용은 차치하더라도 성경이 이런 문헌학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고, 아주 조심스럽게 필사되어 우리에게까지 왔다는 것에 대해서는 굉장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별히 신약성경의 경우 물론 우리는 원본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수천 가지의 사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학자들은 신약성경이 원본의 97-98퍼센트를 복원했다고 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이 그렇게 과학적으로 원본에 가까운 것이라는 겁니다. 일단 그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성경 자체의 형성에 대해서는 굉장히 신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공부한 바에 의하면, 인류 문화 역사에 이런 문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다른 모든 고대 문서들과 비교해 볼 때 이런 신뢰성이 있는 문서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한번 성경을 조심스럽고 깊이 있게 살펴보는 것도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21. 성경의 기적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성경은 기적의 책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만 해도 그렇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동정녀, 처녀에게서 태어났다고 하고, 죽어서 부활했다고 하고, 하늘로 솟아 올라갔다고 합니다. 이런 얘기를 보면 기적 입니다. 그분이 행하신 일도 그렇습니다. 수많은 병자를 고치고, 물 위를 걷고, 빵 몇 덩이로 수천 명을 먹이기도 하고, 이해할 수 없는 기적들이 기록되어 있어서 이것이 신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물론 충분히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라고 하는 분이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끊임 없이 주장했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들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연세계를 만드신 분입니다. 자연의 법칙도 만드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자연의 법칙도 깰 수 있는 분입니다. 자연의 법칙을 깨고도 자연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하실 수 있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예수께서 태어나시고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는 이 모든 기적적인 일들은 자연의 법칙 안에서 설명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가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한 주장과 적어도 논리적으로 맞아 떨어집니다. 만약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얘기하지 않았다면, 이런 기적들은 그저 어떤 한 사람을 영웅화하기 위해 일반적인 신화에서 사용하는 과장된 기법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얘기했고, 그것은 구약에서부터 지속적으로 예고된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관련된 여러 가지 기적들은 오히려 없었다면 이상한, 그것이 발생한 것이 타당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기독교가 얘기하는 것이 정말 진실인지 아닌지 질문하고, 예수가 정말 하나님인지 아닌지 질문해 볼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